강성열교수의 구약사랑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강성열

2021-01-29 (금) 22:19 추천:0 조회:247 121.xxx.100

세상의 모든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그 이어지는 자리엔 어김없이 갈림길이 존재한다. 갈림길은 한 길의 끝점이자 동시에 또 다른 길의 출발점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일생의 길 위에도 무수히 많은 갈림길이 존재한다. 그것과 맞닥뜨릴 때마다 매번 우리는 당혹감과 불안에 사로 잡힌 채,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초조해하고 망설인다. 갈림길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헤어짐과 만남이 함께 이루어진다. 그 어귀에서 우리는 늘 누군가와 헤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와 새롭게 만난다. 그리하여 전혀 낯선, 서로 다른 별개의 인간들이 동일한 하나의 길 위로 흘러들어, 서로 같은 방향을 가늠하며 걷기 시작할 때 비로소 동행이 시작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끼리 같은 길을 함께 밟아가기란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다. 용케 이해와 위안을 나누는 행복한 동행도 많지만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만을 남기는 불행한 동행은 또 얼마나 많은가. 때문에 숱한 만남과 헤어짐이 존재하는 "길 위에서의 인생"은 문학과 예술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오래된 테마이다. 특히 인간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소설에서 '동행'은 즐겨 쓰는 모티프 중 하나이다.

모든 소설은 갈림길에서 처음 만나 함께 출발한 주요 인물들이 최후의 갈림길에서 도착할 때까지 벌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짧은 동행의 길 위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고, 사랑과 배신, 좌절과 희망이 변화무쌍하게 뒤섞이고 엇갈리는 것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는 우리 소설사에서 손꼽힐만한 아름다운 '행복한 동행'이 등장한다. 무대는 어느 여름날 강원도 산골 마을 봉평. 주인공은 외손잡이에 살짝 곰보인, 피륙 잡동사니를 파는 장돌뱅이 허 생원. 볼품없는 가난한 늙은이인 허 생원은 평생 여자와는 연분이 없이, 장터에서 장터로 이어지는 쓸쓸하고 뒤틀린 떠돌이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이십 년 세월에 함께해 온 늙고 추레한 나귀 한 마리 뿐.

봉평 장이 파하자 그는 여느 때처럼 동료 장돌뱅이 조 선달과 함께 충주댁의 술집에 들른다. 거기서 젊은 장돌뱅이 동이를 만나고, 세 사람은 다음 장이 열리는 [진부]와 [대화]를 향해 출발한다.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달빛을 밟으며, 세 마리의 나귀와 함께 떠나는 그들 셋의 동행. 우리 단편 소설을 통해 가장 빛나는 이 아름답고 황홀한 달밤의 정경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꽂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눈부신 메밀꽃과 달빛에 취해, 허 생원은 평생에 단 한 번 꿈결처럼 스쳐간 한 처녀와의 인연을 더듬는다. 젊은 시절, 한여름 달밤 우연히 물레방앗간에서 마주쳐 몸을 섞은 뒤, 그는 영영 행적이 지워져 버린 처녀에 대한 기억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너무나 우연히도, 허 생원은 바로 그 처녀가 지금 동행중인 젊은 동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낮에 방에서 이야기하다가 언쟁이 벌어졌고 어머니 이야기 하다가 우연히 동이는 그날 물레 방앗간에서 꿈결처럼 스쳐간 한 순간의 인연이 남겨 놓은, 바로 허 생원 자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동이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운명적인 해후에 가슴 벅찬 허 생원은 개울을 건너다 고꾸라지고, 그의 여윈 몸을 젊은 동이가 업고 건넌다. 뼈에 사무치도록 따뜻한 동이의 등허리, 허 생원은 마침내 계획을 바꿔, 그녀가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동이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한다.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소설은 허 생원의 이 떨리는 음성으로 끝난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부터 그들만의 또 다른 영원한 동행이 마침내 시작되는 것이다.

박영진 (문학평론가ᆞ책풍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