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열교수의 구약사랑

우리 시대의 하갈을 찾아서

강성열 2003-09-14 (일) 00:00 추천:561 조회:8765 210.xxx.192

Ⅰ

창세기 16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는지가 잘 설명되어 있다. 본래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날 때에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복을 통하여 그 약속을 재확인 받았다(창 15장). 그러나 첫 약속이 주어진 지 10년이 넘도록 그의 아내 사라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상속자를 얻지 못해 초조해하던 아브라함은 하는 수 없이 아내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여종인 하갈을 첩으로 취하였다.

그러다가 아이를 밴 하갈이 사라를 멸시하자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사라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한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사라와 하갈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사라는 하갈을 남편에게 줄 때, 그리고 남편에게 자기를 멸시하는 하갈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
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
시하니.....(창 16:2, 5)

사라의 이 말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사라는 하갈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갈은 사라에게 있어 그저 ‘나의 여종’일 뿐이다.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하갈의 불행한 처지가 두드러지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사라와 하갈 사이의 대화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광야로 피신한 하갈을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16:8).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사라의 여종이라고 하면서도 하갈이라는 이름을 불러주고 있으며, 하갈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심과 동시에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의 물음에 대한 하갈의 대답 역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16:8). 하갈은 자기를 아브라함의 집에서 학대하여 쫓아낸 여주인 사라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Ⅱ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와 사회 안에서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점은 한국 교회의 7할을 점하고 있는 여성도들의 경우 더욱 두드러지며 특히 여교역자들의 경우에는 더 말할 여지가 없다.

오늘날 여교역자들이 처한 자리는 어쩌면 창세기 16장에서 보는 하갈과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겠다. 남의 아이를 낳아줄 수밖에 없는 비천한 처지, 자신의 이름이 공공연하게 불리어질 수 없는 서글픈 현실, 누구로부터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억울한 형편 등은 여자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어려운 여교역자의 삶의 자리와 너무도 일치한다.

오늘의 여교역자들 중 상당수는 마치 첩과도 같이 생산의 도구로만 활용될 뿐이다. 복음의 자식을 낳는 기쁨 속에서 그야말로 ‘이름 없이’ 봉사하면서도 위로를 얻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하갈처럼 광야로 도망칠 수도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비롯된다는 것이 이를 웅변적으로 증언해주고 있다.

Ⅲ

이처럼 험악한 여교역자의 길에 서 있는 우리 호신의 여학생들이 교회음악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애쓰는 교회음악과 여학생들과 더불어 처음으로 회지를 만든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미 많은 회지들이나 회보들이 있는 마당에 또 다시 새로운 활자 매체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지루하게 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학생 회지는 풍성한 읽을거리와 이야기거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면 한다. 기왕에 세상에 나올 바에야 제 구실을 바로 하는 글모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 앞으로 가능하다면 이 회지는 삶의 자리가 다소 다르면서도 공통분모를 가질 수밖에 없는 신학과와 교회음악과의 공동 관심사를 절실하게 반영함으로써, 신학과 여학생들과 교회음악과 여학생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게 해주는 대화의 광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회지는 여교역자의 길을 걷지 않는 교회음악과 여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나눔과 사귐의 마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회지는 오늘날의 무수한 ‘하갈’들을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랑과 섬김의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며,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주는 메시지와 같은 위로와 희망의 편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여핵생 회지는 잡다한 글들의 홍수 속에 또 다른 물줄기를 보태기보다는 그 모든 물줄기를 모아 들이는 저수지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설움 많고 한 많은 농토에 넉넉한 물을 공급하는 커다란 물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회지를 위해 기도하고 땀 흘리는 많은 일군들의 가멸찬 노력으로 여학생 회지가 참다운 여교역자상과 참다운 교회음악 지도자상을 세우는 데 꼭 필요한 매스 미디어가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여학생회지의 앞길에 늘 함께 하기를 빈다.

* 이 자료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1992년 5월에 여학생 회지(지금은? 언제부터인가 중단된 듯)의 창간에 부쳐 쓴 축하의 글입니다. 철이 지난 글이긴 하지만 되새김질을 위한 목적에서 올립니다. 여학생회의 옛 역사를 되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제 홈페이지 게시판의 8번에 실린 <여성 교역의 다양성-풀어야 할 숙제>라는 제목의 글(전국 여신학생 연합회 회지)과 더불어 읽으시면 다소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샬롬!

강성열 2023-09-20 23:17	23-9-21 naver blog